프리랜서로 사는 법ㅣ먼저 고민해야 할 질문들
나를 일으키는 원동력
2024-11-01
「프리랜서로 사는 법」에서는 김정현 프리랜서 에디터가 들려주는 프리랜서만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자유롭지만 불안한 밥벌이에 대한 고충을 통해 프리랜서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프리랜서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리랜서에게 변화와 새로움은 자유로움을 주지만, 가끔 불안감을 주기도 합니다. 내 자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 그안에서 나의 존재를 계속해서 확인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이번 김정현 에디터의 에세이를 통해 나의 자리를 끊임없이 찾고 익숙해져야 하는 프리랜서의 공감 어린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2년 전 겨울, 모 기업에서 ‘회사 내 좌석 형태 선호도’를 알아보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의 핵심은 지정 좌석과 자율 좌석의 선호도 비교였다. 결과는 7:3. 지정석을 고른 사람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변화가 주는 새로움이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이기지 못한 셈이다.
직장인에게는 자기 자리가 있다. 입사하면서 배정받게 되는 자리는 특별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다. 내 책상에 내 컴퓨터가 놓여 있고, 모니터 위에는 내가 해야 할 업무를 정리한 포스트잇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 사진 따위가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내 자리라는 사실은 동료도 상사도 안다. 허락 없이 여기에 앉는 건 실례를 범하는 일이라는 것도. 며칠 휴가를 보내고 돌아와도 책상과 의자는 그대로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도 건강이 안 좋아져 업무 수행력이 조금 떨어질 때도 여전히 우리는 출근할 수 있다. 돌아갈 자리가, 거기에 있다.
안타까운 건 내게는 돌아갈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프리랜서에게 지정석이란 당연하게 보장되는 무엇이 아니니까. 집에 있을 땐 의욕과 집중력이 바닥을 치므로 귀찮더라도 급하면 나가야 한다. 아무 데서나 일할 수 있다는 말이 멋있게 들리는가? 회사 다닐 때는 나도 똑같이 생각했다. 저는 노트북 한 대와 끊기지 않는 와이파이만 있으면 충분해요(찡긋). 물리적으로 매여 있지 않은 자의 무한한 가능성! 자유는 한 끗 차이로 혼란이 된다. 혼란은 한 끗 차이로 불안이 된다. 프리랜서에게 불안과 혼란을 안겨주는 요소는 수입의 변동성 외에도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매해 깨닫는 중이다. 출근할 회사도 개인 작업실도 없는 나는 이따금 부유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데 이 기분, ‘내 자리가 없다’는 감각, 낯설지 않다. 프리랜서가 되기 전부터 알았던 것 같다. 한참 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입성한 스무 살 때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이 거대한 도시에 우리 집은 없다. 가족은 나 빼고 저 멀리 산다. 서대문구에서 동대문구로, 동대문구에서 은평구로 행정구역이 바뀌었으며 앞으로도 운이 나쁘면 2년마다 보금자리를 옮겨야 하는 처지다. 대학 입학부터 지금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서울에서 생활했음에도 다음의 질문 앞에서 나는 머뭇거리게 된다.
당신은 이 도시에 완전히 정착했습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나는 내 자리를 찾은 것 같다. 매일 같이 타고 다니는 시내버스에서. 요즘은 지하철보다 버스를 많이 이용한다. 창밖으로 펼쳐진 화창한 날씨를 만끽할 수 있으니 목적지까지 시간은 좀 걸려도 하루를 통과하는 기분 자체가 달라지는 걸 느낀다. 이동의 신속성과 효율성만큼 중요한 게 감수성 아니던가. 옆 동네로 건너갈 때조차 낭만을 챙기고 싶은 게 나란 사람이다.
승차 계단과 가장 가까운, 버스 맨 앞 1인석은 ‘이동의 감수성’에 최적화된 좌석이다. 버스 전면 창은 거추장스럽게 가리는 것 없이 트여 있다.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도 편하게 창을 바라볼 만큼 의자 높이가 적당하고, 손잡이 역할을 하는 기둥 또한 시선을 해치기보다는 창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프레임을 이룬다. 창문이 측면이 아닌 정면에 위치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너무 빨라서 뭐가 뭔지 모르겠는 풍경 대신 거리의 크고 작은 변화들이 담긴 안정적인 구도의 장면이 펼쳐지니까. 어렵사리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초보운전 차량의 뒤태와 바람이 불어올 때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일렁이는 가로수, 방지턱을 지나며 도로 위로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 같은 건 여기에 앉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승차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여기는 같은 버스를 타는 이들의 얼굴을 가장 먼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하는 (그러면서도 방해받지 않는) 좌석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탄다. 노인과 아이가 탄다. 직장인과 학생과 주부가 탄다. 몸보다도 큰 백팩과 대파가 삐져나온 장바구니와 브랜드 로고가 굵게 새겨진 수영가방이 기사님의 주행 리듬에 맞춰 흔들린다.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버스가 말해주는 것 같다. 너는 몰랐겠지만 서울에는 이런 동네도 있단다. 이런 동네에는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 네이버 지도에 최단 경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탄 11년 차 서울 거주자의 머릿속에 입력되는 건 처음 들어보는 지명과 낯선 정경뿐만이 아니다. 이 도시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실체를 확인하는 감각까지 포함된다.
고작 이 정도 아닐까? 서울에서 ‘나의 자리’라고 부를 만한 장소 말이다. 계절과 거리를 품는 시내버스 앞좌석. 주인장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단골 카페의 바 테이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저녁노을을 바라보기 위해 멈춰 선 빌라 주차장의 귀퉁이. 누구를 데려와 소개해 주기도 민망한 하찮은 지정석이지만 거기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있다.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곳인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대답을 망설일 필요가 없는 질문으로. 얼마든지 머물러도 되는 곳인가. 찾아갈 때마다 환영받는 그 작고 좁은 공간에서, 나는 언제나 즐겁다.
어떤 날에는 내가 갈 데가 없어 서울을 떠다니는 유령 같다고 생각했다. 도처에 정 붙일 곳투성이라는 걸 깨달은 후로는 쓸쓸한 마음이 딱 견딜 수 있는 정도까지만 차오른다. 고독한 시티 라이프의 꿀팁이랄까... 돌아갈 자리 몇 개만 더 만들어 두면, 여기저기 널리 심어 놓으면, 한동안은 이 도시를 조금 덜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