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로 사는 법ㅣ‘유연하다’고 쓰고 ‘불안하다’고 읽습니다
반갑지 않은 메일을 받았다.
2024-03-25
「프리랜서로 사는 법」에서는 김정현 프리랜서 에디터가 들려주는 프리랜서만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자유롭지만 불안한 밥벌이에 대한 고충을 통해 프리랜서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프리랜서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서 어떻게 새로운 자극을 받고 이를 일로 승화시키나요? 김정현 에디터의 에세이를 통해 변화를 끌어내는 나만의 자극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려 합니다.
프리랜서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을까? 이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나는 고민에 잠겼다. 영감이라… 몇 년 전부터 부쩍 자주 출몰하는 이 말이 나는 혼란스럽다. 지나치게 많은 곳에서 지나치게 다양한 맥락과 의도 아래 언급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영감이란 단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과연 내가 정의하는 영감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어사전부터 살펴봐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영감의 뜻은 크게 두 가지다.
1)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
2)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
어떤 대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말할 때 2)를 의미한다는 건 대다수가 동의하는 부분일 테다. 그럼 계기란 무엇인가.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변화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다. 영감이란 나로 하여금 창조적인 일을 하도록 강력하게 추동하는 외부의 자극인 셈이다. 중요한 건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 자극 뒤에 따라 오는 실천과 수행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그건 영감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거짓말을 해왔다. 감탄하며 읽은 매거진을, 감동하며 시청한 드라마를 영감의 원천이라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내게 깊은 영감이 되었으니 당신들도 어서 경험해 봐야 한다며 건방지게 설교까지 한 게 코미디다. 냉정하게 자문해 본다. 그게 정말 너를 변화시켰냐? 새로운 시도로 이끌었다고?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오해하고 있다. 소비와 영감을 혼동하고, (변화를 끌어내지 못하는) 자극과 영감을 동일시한다. 많이 보고 듣는 건 그냥 많은 감상과 많은 소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내 것이라 착각하는 순간부터 일은 위태로워지고 삶은 얄팍해진다. 나를 스쳐 가는 수많은 요소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싸잡아 영감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건 성급한 처사다. 우리 삶에는 나의 방향과 속도를 바꿔 놓는 분명한 사건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2022년 12월. 나는 5개월밖에 안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향한 불만과 내 역할에 대한 아쉬움과 향후 커리어에 관한 고민을 품고서.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두 달 정도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불안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중대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다음의 두 가지 팩트폭력 덕분이다.
먼저 신뢰하는 H의 말. “내가 지켜본 너는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야. 네 삶의 즐거움을 찾고 싶은 욕망도 강하지. 근데 있잖아, 정말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꼭 몸을 사리는 것 같더라. 그냥 너를 좀 믿었으면 좋겠어. 너를 믿는 내가 바보는 아니거든.” 과연 소울메이트이자 천적 중의 천적다운 일갈이었다. 입만 살아서 주체적인 삶이니,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거니 잘도 떠들어대던 갈팡질팡 사나이를 따끔하게 혼내준 ‘사린다’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내 열등감을 찔렀다.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처음엔 멍해졌으나 이내 후련해졌다. 인정하면 편하다.
두 번째 가르침은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띄워준 어느 거리 인터뷰 영상으로부터. 리포터가 지나가던 할머니를 붙잡고 묻는다. 젊었을 적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요? “겁 좀 내지 마.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인생은 위기투성이거든. 뭐가 무섭다고 겁만 내면서 살았나 몰라. 터닝포인트라는 건, 위험을 무릅쓸 때만 생기는 거야.” 그때 알았다. 지금이 그 포인트를 만들 때구나. 회사를 다니든 관두든, 여행을 떠나든 집에서 일만 하든, 어차피 위기는 징하게 따라올 거다. 예측은커녕 상상도 못 할 모습으로.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 그건 팔자 좋은 소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라는 걸 이름도 모르는 화면 속의 할머니가 알려줬다. 나는 내 선택으로 쌓은 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기꺼이 무리해 보자. 내 뒤로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이 남을 것이다.
퇴사 후에는 뉴욕으로 떠났다. 세계 최고의 대도시답게 전례 없는 자극의 향연을 만난 시간이었다. 거기서 보고 듣고 먹고 대화한 2주 간의 여행은 조각조각 내 머리와 가슴에 박혀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뉴욕 여행이 안겨준 다채로운 경험보다 더 깊은 영감을 선사한 주인공은, 퇴사와 여행이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그날의 선택 그 자체.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위해 결정하고 실행한 선례를 남겼다. 덕분에 앞으로 다가올 무수한 갈림길이 덜 무섭다. 아주 가까이에, 내가 직접 쌓은 든든한 레퍼런스가 있다.
실제로 여행 이후 1년 넘게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할 경우가 많았다. 안전빵과 모험 사이에서 시름이 깊어질 때마다 나는 지난겨울을 떠올렸고, 대개 모험이라 여겨지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안과 걱정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이겠으나 한 톨의 후회도 남지 않았다는 점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과감한 시도와 예기치 못한 변화를 거듭한 이 시간에 나는 성장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각종 문화 예술 작품과 브랜드, 트렌디한 콘텐츠 따위가 어떻게 내게 영향을 줬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반면에 내 일상을 담보로 저지른 행동은 명백한 결과를 만들어냈고, 이 과정은 앞으로도 내 삶 구석구석에 들러붙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테다.
더 이상 ‘영감을 받는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영감은 가만히 앉아서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게 영감은 얻는 것이고, 발견하는 것이며, 소화하는 것이다. 영감의 씨앗은 어디에나 있지만 가장 큰 잠재력을 품은 씨앗은 가까운 곳에 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영감을 어디에서 얻나요?”
“제 안에서 길어 올려요.”
김정현
작가 겸 에디터
에세이 「나다운 게 뭔데」를 썼다.
유튜브 채널 '현정김'을 운영한다.
디지털 미디어 <디에디트>와 뮤직&라이프스타일 매거진 <BGM>의
객원 에디터로도 활동 중이다.
어떤 분야든 은근슬쩍 내 이야기를 끼워 넣을 때 가장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