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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로 사는 법ㅣ게으르고 자유로운 여름 휴가를 위하여

202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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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로 사는 법」에서는 김정현 프리랜서 에디터가 들려주는 프리랜서만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자유롭지만 불안한 밥벌이에 대한 고충을 통해 프리랜서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매년 찾아오는 프리랜서의 여름 휴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리랜서는 이마저도 섣불리 떠나기 쉽지 않은데요. 쉰다는 것도 하나의 업무를 위한 과정처럼 느껴질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정현 에디터의 에세이를 통해 곧 다가올 여러분의 여름 휴가에 대해서도 한 번 곱씹어 보길 바랍니다.

지난 3월에 도쿄 여행을 다녀왔다. 5박 6일 동안 혼자 열심히 돌아다녔다. ‘열심히’라는 표현을 쓸 자격이 충분하다는 건 숫자가 말해준다. 아이폰 건강 앱을 눌러보니 최소 14,253보를 걸었다고 나온다. 가장 많이 걸은 날은 26,399보였다. 게다가 지하철 요금은 5만 원이 나왔다. 한 달 내내 따릉이를 제외한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서울시 기후동행카드 가격이 62,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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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 중에 내가 가장 많이 뱉은 말은 ‘한국 가서 후회 안 하겠어?’였다. 뭐 대단한 거 한다고 그렇게 비장했는지. 비장한 수준까지는 안 가더라도 단호할 필요는 있었다. 이 여행의 목적은 휴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뭘 했다고 쉬는가. 연초에 일이 많이 줄어 설렁설렁 보내고 있던 터라 쉬기 위해서 일본까지 간다는 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하러 간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나에게는 해외 워크숍을 보내줄 회사가 없었다. 출장 업무를 맡기며 경비를 지원하는 의뢰인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보내주기로 한 거다. 내돈내산 셀프 워크숍. 하는 만큼 일이 되고 모든 활동이 작업의 소스가 되는 프리랜서로서 이건 일종의 투자였다. 투자한 비용 이상으로 회수하리라는 믿음이 나의 유일한 스폰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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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이 바닥나고 계획이 어긋나 짜증이 솟구칠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커피를 두 잔 마셨는데도 요즘 도쿄 멋쟁이들이 몰려든다는 A 카페를 기어이 찍고 왔다. 연이은 강행군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마지막 날 밤에는 왔던 길을 거슬러 오래전 점 찍어둔 B 피자집으로 향했다. 조금만 머뭇거려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후회하기 싫으면 깝치지 말고 가라. 너 여기에 쉬러 온 거 아니다. 


할까 말까 할 때는 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갔다.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었다. 덕분에 예산은 한참 초과했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3월의 도쿄행은 최선을 다한 여행이었다. 최선을 다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마음에 잘 새겼고, 그 다채로운 소스를 바탕으로 콘텐츠 제작 업무도 여러 건 수행했으니 나름 성공적인 ‘인사이트 트립'을 누린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휴가를 떠나고 싶다. 트립 말고 베케이션을. 일하거나 노는 거 말고, 진짜 휴식을. ‘거기까지 갔는데 그걸 안 해?'라는 말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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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너는 진짜 쉰다는 게 뭔지 모르는 것 같아. 네가 쉴 거라고 말한 날의 일과를 가만히 지켜봐. 어떻게든 알차게 놀고 싶어서 일할 때보다 더 바쁘게 돌아다니잖아.”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쉬는 것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라… 생각해 보면 그건 일상에서나 여행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자극’이라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놈의 인풋 인풋 인풋!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만나고, 재밌는 콘텐츠를 감상하고, 몸으로 경험하며 내 삶에 입력하는 과정에 안달이 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집어넣은 걸 소화할 시간이 없었다는 거다. 지가 무슨 푸드파이터도 아니면서 게걸스럽게 욱여넣기만 하면 반드시 급체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왜 인지하지 못했을까? 소비와 경험은 그 자체로 사람을 발전시키거나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건 실마리일 뿐이다. 씨앗이 자라려면 물과 햇빛과 바람이 필요하듯 내가 흡수한 자극이 진정 나를 움직이는 영감으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이를 소화하고 해석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동반돼야 한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내 일상에 녹아들도록. 나는 간절히 바란다. 여행하며 만난 무수한 존재들이 숏츠나 릴스 이상의 역할을 해내기를. 무한 스와이프의 늪에서 도파민만 찾아 헤매다 현타로 마무리하는 새벽 2시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믿음을 현실로 만드는 건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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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춰 가는 시간을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 보낼 수 있다면 효과는 배로 커지지 않을까? 일상의 희노애락과 갖가지 구차한 흔적들이 널려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나를 물리적 정신적으로 가만 놔두지 않으니까. 현생은 조금만 눈을 돌려 봐도 확인하고 관리하고 머리 싸매야 할 존재로 가득하다. 그런 환경에서 다 모른 척 외면하고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 반면에 여행 중에는 온통 생경한 장면들을 만난다. 사람은 낯선 풍경 앞에서 겸허해지고, 겸허해짐으로써 시야가 열린다. 익숙한 것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확보된 일상은 조금 느릴지언정 더 선명한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 여태 온갖 자극에 절여져 살아온 자극피클, 자극장아찌는 이제 선명한 발자국을 느릿느릿 남기는 삶에 관심이 많다. 워케이션이나 인사이트 트립 대신 게으른 휴가가 필요한 이유다. 프리랜서에게는 연차도 월차도 장기근속 휴가도 없으므로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불안하니 걱정되니 벌벌 떨지 말고 단호해져야 한다. 바람을 현실로 만드는 것 역시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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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보다 놀이보다 휴식을 중시하는 친구는 얼마 전 혼자 강원도로 휴가를 다녀왔다. 가기 전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취소하니 마니 되도 않는 엄살을 부려대더니 서울로 돌아온 그의 얼굴은 한층 환해져 있다. 작열하는 태양과 넘실거리는 파도, 짙은 녹음이 선사하는 여름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왔겠지. 무엇보다 그는 그곳에서 혼자였다. 해야만 하는 일들과 피하고 싶은 방해꾼들로부터 잠시 멀어져,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문장을 쓰고 걷고 싶은 길을 걸었다. 최선을 다하는 대신 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루를 보냈다.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걸 택했으나 결과적으로 가득 채우고 돌아온 시간이 된 셈이다. “취소했으면 어쩔 뻔했어~” 하는 그 말에 나도 덩달아 안도감을 느꼈다. 


30대에 들어선 후 가장 절감하는 사실은 삶은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느낀 사실은 예상보다 좋은 쪽으로 흐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휴가도 그렇다. 난 이제 어디로 떠나야 할까? 목적지가 어디로 정해지든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열정 대신 여유를 택할 것. 게으르고 자유로운 여름휴가가 기다리고 있다.


김정현 작가 인스타그램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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