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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로 사는 법ㅣ예쁘고 멋있는 옷이면 됩니다

20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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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을 입고 출근해 본 적이 없다. 정확히는 재킷부터 셔츠-타이-구두로 이어지는 완벽한 구성의 정장 차림을 한 적이 없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금융권에 다녔다면 얘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셔츠 하나만 걸치고, 혹은 스웨트셔츠에 와이드 핏 데님 팬츠를 입고 갔다가는 사석에선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사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을 게 뻔하다.


"너 여기 패션쇼 하러 왔니?”

키보드를 치고 있는 김정현 작가의 사진

다행히 첫 직장은 복장에 대해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단체로 맞춰 입는 유니폼이 없었고 (단체라고 해 봤자 5명 남짓이었다), 오늘의 스타일이 얼마나 감각적인지 구린지를 대놓고 평가하는 일도 없었다(뒤에서는 또 모른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주어진 일을 잘하는 것뿐이었다. 회사에 다니며 면박 혹은 따가운 시선을 받은 적이 있다면 그건 모두 내가 나의 과업을 탁월하게 수행하지 못한 까닭이리라(인성 문제가 아니었기만을 바란다).


직원이 20명이 넘어가는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대표님부터 반바지를 입고 올 때가 많았다. 비 오는 날에는 크록스를 질질 끌고 나오는 팀원들도 있었다. 나도 내 맘대로 입고 다녔다. 적절한 복장 같은 건 알 바 아니고 그저 멋있어 보이고 싶었지. 물론 늦잠을 자서 머리를 안 감은 날에는 모자를 썼다. 회사에 모자 쓰고 출근하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하루 이틀 익숙해지니 머리가 조금만 길어져도 습관적으로 볼캡에 손이 가더라. 면도를 3일 이상 안 하는 날도 점점 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내가 봐도 좀 심했다. 불쾌함을 느꼈을 동료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김정현 작가의 뒷모습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출근하는 건 장단점이 뚜렷한 일이다. 우선 업무와 상관없는 영역에서 지적당하거나 간섭받지 않아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회사의 구성원이지만 김정현이라는 개인의 분위기를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다 똑같은 머리에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모두 똑같은 침상에 누우며 급격히 우울해졌던 논산훈련소 시절을 떠올리면, 내 옷을 입는다는 게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늘어난다는 불편함도 있다. 지각하게 생겼는데 옷장 앞에 서서 ‘아, 진짜 오늘은 뭐 입냐’ 고뇌하고 있노라면 산다는 게 참 성가시게 느껴진다. 만약 회사에 스타일시리한 직원들이 즐비하다면? 심지어 사무실 위치가 요즘 가장 핫한 동네 한복판이라면? 워스트 룩은 피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내 모습에 현타가 찾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제 입은 옷을 오늘도 내일도 입는 게 뭐 어떻다고 괜히 주변을 의식하던 나, 멋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김정현 작가 사진3

이제는 회사에 나가지 않는다. 엉겁결에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5일 내내 마주쳐야 하는 동료들이 사라졌다. 웬만한 소통은 메일과 카카오톡과 전화로 이뤄지니 복장의 자유도는 최대치에 달할 수밖에. 기상룩과 출근룩과 취침룩이 모두 같은 날도 있다. 물론 인터뷰하거나 업무 제안 미팅에 참여할 때는 평소보다 힘을 더 준다. 믿을 거라곤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나기도 전부터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회사 간판이, 최소한의 신뢰를 갖게 해줄 직책이나 직급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호감 섞인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야 하는 만큼 일단 말끔한 스타일을 갖추는 것부터 시작하자. 내가 가진 고유한 매력과 분위기가 잘 전달되도록. 특히나 동시대의 문화와 트렌드를 건드리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요즘 패션, 요즘 브랜드를 꾸준히 지켜보고 있다고 넌지시 드러내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유난스럽긴 하지만 뭐 어떤가. ‘우리가 이런 감각을 지닌 사람과 일하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라도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라 여기면 될 테다. 어차피 내 능력과 잠재성을 어필하며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는 자신 있다.

김정현 작가의 사진4

옷으로까지 자기 PR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프리랜서로 사는 게 참 녹록지 않은 거구나 싶다. 동시에 ‘제 발로 야생의 세계에 뛰어든 주제에 엄살도 심하구먼' 다그치기도 한다. 실력과 결과물만으로 진즉에 증명을 끝내고 메일함 가득 찬 작업 제안을 깐깐하게 검토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머니까. 가만히 있어도 다 알아보고 찾아올 때까지 나는 나를 홍보하고 영업해야 한다.


뭘 하든 플러스알파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자이자 마케터이자 사장님인 나에게 옷 또한 프리랜서 김정현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과정에 소소한 힘을 더할 자원 중 하나다. 다시 말하지만, 그 소소한 힘이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경지에 이르기엔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작업 중인 사진

그러니까 내게는 특별한 작업복이랄 게 없는 셈이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스타트업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내가 입는 옷은 늘 비슷했다. 불편한 옷만 아니면 된다. 작업의 98%가 맥북 하나 놓고 자판만 두들기는 거라 뭘 입어도 크게 불편할 일이 없다. 컴퓨터만 있으면 나는 어디서든 일할 수 있고, 그때 입고 있는 옷이 곧 작업복이 된다. 맞춤 정장을 입든, 츄리닝을 입든, 며칠씩 같은 옷을 입고 다니든 아무렴 상관없다. 


차라리 그냥 예쁘고 멋있는 옷을 고를 테다. 작업복과 일의 능률 간의 상관관계 따위를 고민할 시간에. 이왕이면 그냥 프리랜서 말고 옷 잘 입고 스타일리시한 프리랜서로 기억되면 얼마나 좋아. 나한테 더 의미 있는 건 그런 것들이다.




김정현

작가 겸 에디터


에세이 「나다운 게 뭔데」를 썼다.

유튜브 채널 '현정김'을 운영한다.

디지털 미디어 <디에디트>와 뮤직 &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BGM>의 객원 에디터로도 활동 중이다.

어떤 분야든 은근슬쩍 내 이야기를 끼워 넣을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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